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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을 노래한 애송시 세편

숑숑파 2024. 1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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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 - 윤주영

하늘 틈새로 밀려온 바람에
나뭇잎은 서로 부비며
온갖 아름다운 음률로
사랑을 이야기 하다가

여름동안
사랑은 석류 알처럼 영글어
어쩔 몰라 하던
불붙은 가슴을

끝내는
가슴을 풀어 헤치고
가을 산에 대굴 대굴 굴렀나 보다

 
시집 <햇볕은 노을너머 저녁배를 타고> 2010, 창조문예

 

2004년 월간 <창조문예> 신인상으로 등단한 윤주영 시인의 첫 시집에 실린 작품이다. 직장인으로 살면서 작품활동을 해온 시인은 뒤늦은 63세에 등단하였다.
젊은 시절 몇편의 습작시를 끄적거리다 만 내게 그의 늦깎이 데뷔는 존경스럽다.
 
불붙는 듯한 가을의 붉은 빛을 이렇게 강렬하게 그린 시가 있을까.
나뭇잎의 부대낌은 사랑의 노래이고, 물든 단풍은 사랑의 결실이다. 뒹구는 낙엽은 쓸쓸한 풍경이 아닌 가슴 풀어 해친 붉은 열정이 된다.
쓸쓸하고 고즈넉한 가을을 불타는 열정과 사랑으로 그려낸 노시인의 시선이 남다르다.
 

가을에 - 오세영

너와
가까이 있는 까닭에
우리는 봄이라 한다.
서로 마주하며 바라보는 눈빛
꽃과 꽃이 그러하듯

너와
함께 있는 까닭에
우리는 여름이라 한다.
부벼대는 살과 그리고 입술
무성한 잎들이 그러하듯

, 그러나 시방 우리는
각각 홀로 있다
홀로 있다는 것은
멀리서 혼자 바라만 본다는
허공을 지키는 가지처럼

가을은
멀리 있는 것이 아름다운 계절이다

 
시집 <꽃들은 별을 우러르며 산다> 1992, 시와시학

 

서울대 국문과 명예교수인 오세영 시인은 불교적 세계관을 시에 반영한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가을시는 사랑이 싹트는 봄과 사랑이 불타는 여름을 지나 빈 가지처럼 홀로 남는 쓸쓸한 가을을 그려낸다.
그리고 시의 말미 “가을은 멀리 있는 것이 아름다운 계절이다”라는 구절은 가을을 정의하는 것처럼 기억에 남는 표현이다.
 

가을볕 - 박노해

가을볕이 너무 좋아
고추를 따서 말린다
 
흙마당에 널어놓은 빨간 고추는
물기를 여의며 투명한 속을 비추고,
 
높푸른 하늘에 내걸린 흰 빨래가
바람에 몸 흔들어 눈부시다
 
가을볕이 너무 좋아
가만히 나를 말린다
 
내 슬픔을
상처 난 욕망을
 
투명하게 드러나는
살아온 날들을

 
시집 〈너의 하늘을 보아〉 2022, 느린걸음 

 

한 때 얼굴 없는 시인, 노동자의 시인으로 알려졌던 박노해 시인의 근작이다.
그는 너무나도 충격적이고 강렬한, 저항 문학의 명작으로 남은 <노동의 새벽>(1984)으로 유명했지만, 1991년 사노맹 결성 등의 죄목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복역 7년 6개월만에 석방된 시인은 사진가로 활동하며 서정적인 시편을 우리에게 선물하고 있다.
 

대학시절 숨죽여 읽고 외우던 박노해의 처절한 시집, <노동의 새벽>

 

그는 진홍빛 열정과 저항의 몸부림으로 타올랐던 파란만장한 삶을 살고 인생의 황혼을 지나고 있다.
그의 그 오랜 슬픔과 상처로 가득한 삶은 투명한 가을볕에 치유되고 있다.
이 아름다운 가을은 고독과 회한의 시간이지만 조용히 젖은 마음을 말리는 평화와 회복의 시간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게 보면 가을볕은 슬픈 존재를 치유하는 신의 눈빛이다”
김경복 평론가, 이 시에 대한 시평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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