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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반 리뷰 : Arco [Coming To Terms/4 EPs](2003)

숑숑파 2024. 6.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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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필자가 작성한 라이센스 음반 해설지를 수정하여 재작성한 것으로 국내 웹진에 기고했던 글임)

 

 빛나는 사색의 심연으로 활강해가다

 

Arco [Coming To Terms/4 EPs](2003), 파스텔뮤직

 

1990년대 이후 록 음악의 경향 중 하나는 개인의 내면과 감정을 표현하는 미시적이고 사적인 영역에 대한 관심이다. 특히, 슬픔과 느림의 미학을 표방하는 슬로코어(slo-core) 장르는 아마도 록 음악이 지닌 가장 연약한 단면일 것이다. 
이 단면은 베드헤드(Bedhead)와 같이 검고 침울한 기운으로 드러나기도 하며, 로우(Low)와 같이 신비스런 장막이 드리워져 있기도 하며, 레드 하우스 페인터스(Red House Painters)와 같이 영롱하게 빛나기도 한다. 
그리고 이들 ‘우울의 연대’와 동행하는 느린 하강의 와중에 우리는 알 수 없는 혼잣말처럼 한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아르코(Arco)라는 수줍은 이름을 발견하게 된다.
 
아르코는 영국 런던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3인조 슬로코어 밴드이다. 슬로코어의 느낌과 묘하게 어울리는 밴드의 이름은 영어의 bow(활)에 해당하는 이태리어로서 현악기의 줄을 뜯는 피치카토 주법에서 다시 활을 켜는 주법으로 돌아갈 때 쓰는 악보 표기법인 ‘arco’에서 따왔다고 한다. 
이들은 1990년대 후반부터 활동을 시작했지만 그다지 알려진 곡이 없으며 실험적 성향을 지닌 밴드도 아니다. 정규 앨범을 발표하기 전에 내놓은 세 장의 EP 앨범은 비밀스런 일기와도 같은 서너 곡의 소품들을 담고 있으며, 이런 빈한한 디스코그래피만큼 사운드 역시 내향적이고 소박하기만 하다.  

아르코, 크리스 힐리(Chris Healey)의 연주 모습

 

서정주의 포크 싱어의 원류인 닉 드레이크(Nick Drake)의 감성에 닿아 있는 크리스 힐리(Chris Healey)의 속삭이는 듯한 노래는 내성적인 소년의 목소리 같기도 하고 묘하게 중성적으로 들리기도 한다. 
또 섬세하고 맑은 기타 아르페지오나 희미한 어쿠스틱 기타 스트로크로 만들어내는 다운비트(downbeat) 위주의 연주는 악기의 톤을 높이거나 기교를 과시하는 일 없이 철저하게 절제된 연주를 고집한다. 
그래서인지 크리스의 쌍둥이 형제이자 드럼과 퍼커션을 맡고 있는 닉 힐리(Nick Healey)와 베이시스트 데이비드 밀리건(David Milligan)의 존재감은 희미해 보인다(특히, 드럼은 스틱을 힘없이 떨구듯 게으르고 나약한 비트를 벗어나지 않는다).
 

[Coming To Terms](2000)의 오리지널 재킷

 
이번에 발매된 라이센스 앨범은 유일한 정규 앨범인 [Coming To Terms](2000)와 네 장의 EP 수록곡 중 [Coming To Terms]에 실리지 않은 싱글 곡들을 묶어 2CD로 발매되어 이들의 전작을 감상할 수 있도록 알차게 구성되었다.
또한, 매트 도넌(Matt Dornan)이 아트워크를 맡았던 [Coming To Terms]의 오리지널 재킷은 고독의 극한을 형상화하듯 처연한 미감을 뿜어내고 있는데, 이번 라이센스 앨범 재킷도 이에 뒤지지 않는 감각으로 수록곡들의 정적인 느낌을 시각적으로 대변하고 있다.
 
소통의 부재와 타자와의 단절에 관해 노래하는 첫 곡 “Speak”는 살짝 증폭된 오베이션(ovation) 기타 음과 들릴 듯 말 듯 간헐적으로 울리는 베이스와 드럼 소리로 진행되고 있으며, 외계인이 된 것만 같은 소외감과 이질감을 토로하고 있는 “Alien”도 코러스 부분에 가볍게 디스토션을 먹은 일렉트릭 기타 연주가 잠시 등장하기도 하지만 역시 느리고 우울한 무드를 지속해간다.
또 4분을 넘기는 법이 없는 수록곡 중에서도 가장 짧은 “Babie’s Eyes”는 그 러닝 타임이 야속할 정도로 깊은 여운을 남기는 곡이다.

Arco의 “Alien”이 OST에 실렸던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

 
한편, 몇몇 곡에는 현악기, 브러스, 건반 등의 악기가 효과적으로 쓰이고 있다. 
트럼펫 연주가 삽입된 “Accident”, 애절한 비올라 선율과 대기 속으로 울려 퍼지는 듯한 스틸 기타가 호흡하는 “Movie”, 오보에(oboe)와 오르간 소리가 어둡고 우울한 단조의 무드를 심화시키는 “All This World”, 곡명 그대로 고즈넉한 피아노 소리에 이끌려 포근한 잠으로 빠져들게 하는 “Lullaby” 등은 어쿠스틱 기타 중심의 단조로운 연주에 장식적 요소를 더하고 있다. 
그 외에 “Grey”는 기타의 아르페지오 주법과 둔탁한 스트로크가 번갈아 등장해 변칙적인 컨트리 록의 느낌을 풍기는 곡으로서 앨범에서 유일하게 거친 결을 함유한 트랙이다. 
이렇게 별 다른 자극과 변화가 없는 분위기와 연주 패턴을 고수하고 있긴 하지만 그다지 지루하게 들리지 않는 것은 이처럼 필요한 부분에 다양한 악기들을 활용하거나 임팩트를 가함으로써 변화를 꾀하고 있기 때문이다.
 
EP 앨범들에서 모아진 싱글 곡들 역시 아름다운 멜로디와 서정적인 무드로 빛나고 있다.
“Distant Lies”, “20000 ft.”, “Sleep”은 데뷔 EP [Longsighted](1998)에 수록되었던 곡들로서, 특히 “20000 ft.”는 바스러질 듯 가녀린 크리스의 노래를 보듬는 오르간 소리와 느리게 퍼져 가는 드럼 비트에 바순(bassoon) 연주가 더해져 아련한 공간감을 조성하고 있다.
역시 1998년에 발매된 EP [Ending Up]에 담겼던 “Cry”, “No-one at the Wheel”, “At Least”, “Doubts Remain”은 기타 연주 위주의 포크 발라드이며, 그밖에 비교적 최근 작품인 싱글 앨범 [Alien](2001)에 수록되었던 “Lie”와 “Someone Else”, 역시 싱글 앨범 [Driving at Night](2000)에 실렸던 “Here” 등 대부분의 곡이 기타와 피아노 중심의 간소한 편성으로 소박한 연주를 이어가고 있다.
 
특이한 점은 베이스와 드럼의 역할이 더욱 축소되어 마치 싱어송라이터 크리스 힐리의 솔로 연주를 감상하는 듯 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멤버들은 밴드라는 집단적 정체성에 얽매이지 않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심지어 크리스는 라이브 연주가 부담스럽다고 말하고 있는데, 자신들은 그 정도로 열정적이지 못하며 라이브를 통해 청중들에게 자신들의 음악을 과장해 전하는 행위에 관심이 없음을 솔직하게 밝히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느슨한 결속과 그저 혼자만의 고백을 하는 듯한 연주 스타일은 오히려 자유롭게 느껴지며 이들의 내향적인 사운드에도 어울리는 방식으로 생각된다.
 
아르코는 처연한 사운드만큼이나 절망적인 목소리로 타자와 세상을 향한 무기력과 무감함을 고백한다.
“Driving at Night”에서는 정박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자신의 삶을 정처 없는 한 밤중의 드라이브에 비유하고 있다. 그리고 총성이 들려오는 불안한 밤에 외롭게 잠을 깬 화자는 멀리 사라져버린 사람을 떠올리며 갑작스레 눈물을 떨군다(“Into Blue”).
그리고 이런 애상은 비약되어 믿음, 명성, 사랑 그리고 모든 것이 거짓말이라고 냉소하고(“Distant Lies”, “Lie”), 자신의 존재감과 정체성을 부정하는 데까지 다다른다(“Someone Else”, “Here”).
마침내 화자는 삶이 결말이 뻔한 저질 영화와도 같고 모든 것은 회색일 뿐이라며 비관하다(“Movie”), 소외와 상실감에 사로잡혀 있는 자신을 구해줄 ‘사고’와 같은 반전을 절박하게 갈망하기도 한다(“Accident)”. 그러나 아르코의 고백은 슬픔과 열패감에만 갇혀있는 것은 아니다.
성기게 직조된 음률 사이에는 마치 삶의 단면에서 사색하는 듯한 응시의 시선이 있다. “Babie’s Eyes”에서 비 내리는 겨울 거리를 쓸쓸히 배회하던 화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아기의 눈동자이다.
또 사랑 받지 못한다는 강박과 공포에서 벗어나 그저 잠에 빠져보라고 다독이는 “Lullaby”의 위무나 비행기 안에서 저 아래 세상과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 갖는 상념을 노래한 “20000 ft.”의 관조는 멈춰선 듯 평화롭다.
 
아르코의 음악적 색채를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느리고 긴 호흡을 쉬며 고독감 속에서 갖는 사색의 음률’이라 말하고 싶다. 
화려한 연주기교나 실험적인 음향과는 거리가 멀지만 아르코의 소박한 음악은 분주한 일상을 살아가는 청자들에게 소중한 침묵의 여백을 선물하고 있다. 
그리고 어느새 우리는 이 여백의 선율을 타고 저 아득한 사색의 심연을 향해 기쁘게 활강(滑降)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20031114 작성


수록곡
disk 1 : [Coming To Terms] 
1. Speak
2. Alien
3. Flight
4. Driving At Night
5. Babies’ Eyes
6. Accident
7. Movie
8. Grey
9. Into Blue
10. All This World
11. Lullaby

disk 2 : [4 EPs] 
1. Distant Lies
2. 20000 ft
3. Sleep
4. Cry
5. No-One At The Wheel
6. Lie
7. Someone Else
8. Here
9. At Least
10. Doubts Re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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