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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 :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Lost In Translation), 2003

숑숑파 2024.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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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진 [weiv]에 게시된 필자의 글을 수정함

 

영화 [Lost In Translation] 영문 포스터, 출처 : IMDb

거대도시 도쿄의 고독

몇 년 전 도쿄에 갔을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신주쿠나 하라주쿠 같은 번화가를 지나던 젊은이들의 자유분방함이나 도시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첨단 테크놀로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도쿄가 깊은 고독감에 휩싸인 도시라는 느낌이었다. 물론 그것이 낯선 땅에 여행을 온 나 자신의 처지 때문이었는지도 모르지만 호텔 스카이 라운지에서 보았던 화려하지만 왠지 적막한 야경과 점심시간에 커피 숍에서 혼자 샌드위치를 먹던 어느 노인의 표정에 깃들어 있던 것은 숨막히는 외로움이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이 영화를 다시 보며 그 때 내 온 몸을 휘감았던 쓸쓸함을 다시 떠올리고 있다.

 

귓속말 같이 속삭이는 숨겨진 명작

국내에서는 2004년 개봉한 [Lost In Translation](우리말 개봉명 :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은 거장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Francis Ford Coppola) 감독의 딸인 소피아 코폴라(Sofia Coppola)의 두 번째 작품이다.

미국에서는 골든 글러브 뮤지컬/코미디 부문 각본상, 남우주연상(빌 머레이), 작품상을, 아카데미 각본상을 수상하는 등 비평가들과 영화 팬들의 호평을 받은 수작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밥 해리스라는 이름의 한물간 중년 배우가 위스키 광고 촬영을 위해 도쿄의 한 호텔에 머물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일밖에 모르는 사진작가 남편을 따라와 무료하게 소일하는 샬롯을 만나게 되고 결국 서로에 대한 동질감을 확인하며 사랑하게 된다는 이야기가 전부이니 말이다.

 

연진 역시 화려하지는 않은데, 밥 해리스 역의 빌 머레이(Bill Murray)는 [Saturday Night Live] 출신의 코메디언으로서 [사랑의 블랙홀(Groundhog Day, 1992)]과 같은 영화를 통해 국내에 얼굴을 알린 바 있으며, 상대역인 샬롯으로 분한 대스타 스칼렛 요한슨(Scarlett Johansson)은 당시만 해도 [프릭스(Eight Legged Freaks, 2002)에 조연으로 나왔던 20살의 신예였다.

 

그러나 영화의 소박한 외형 속에는 잔잔하고 깊은 울림이 자리하고 있다. 낯선 도시의 호텔에서 만난 중년의 유부남과 젊고 매력적인 유부녀의 만남은 불륜의 침침함도 짜릿한 로맨스도 아닌 절박한 연대감으로 맺어진다.

그리고 영화는 제목이 암시하듯 소통이 부재하는 이방의 도시에 유폐된 고독한 인물들의 내면에 말을 아끼고 조용히 다가선다.

각자의 배우자로부터 소외된 두 주인공은 내내 불면증에 시달리며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거나 호텔 바에서 술을 마신다. 이런 장면에서 빌 머레이는 무기력한 중년 남자의 고독감과 심드렁한 표정을 특유의 허무한 유머와 함께 절묘하게 연기하고 있다.

또 샬롯은 호텔 방에 있는 내내 속옷 차림으로 창가에 웅크리고 앉아 도시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곤 하는데 영화의 첫 장면부터 등장하는 그녀의 맨다리는 관능적인 느낌보다는 버림받은 소녀의 모습 같이 묘하게 보호본능을 자극한다.

달콤한 사랑의 밀어 한 마디 내뱉지 않는 밥과 샬롯은 심지어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는 이별의 순간에서마저 다시 만날 기약인지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고백인지 모를 귓속말로 속삭인다.

 

몽환적인 드림팝을 찾아듣는 즐거움

내러티브와 감정발화보다는 여백과 침묵이 강조된 이 영화에서 음악은 대단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OST의 중심은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My Bloody Valentine)의 리더 케빈 실즈(Kevin Shields)이다.

그는 이 앨범에 신곡 “City Girl”과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의 명반 [Loveless](1991) 수록곡 “Sometimes” 등 총 5곡을 제공했다.

그리고 모든 곡들이 뮤직비디오와 같은 느낌으로 영화의 장면들과 절묘하게 호흡하지만, 특히 택시 안에서 샬롯이 술에 취해 도쿄의 야경을 쳐다보는 씬에 등장하는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의 “Sometimes”나 밥이 샬롯과 작별의 키스를 나누고 공항으로 향하는 마지막 장면에 흘러나오는 지저스 앤 메리 체인(The Jesus & Mary Chain)의 대표곡 “Just Like Honey” 등 1980년대 언더그라운드 씬에서 유행한 드림팝 계열의 음악은 영상의 힘을 얻어 감각적으로 부활한다.

가라오케 앞에 앉은 두 주인공, 출처 : 네이버 영화

 

또 영화에서 주인공들이 부르는 노래들을 찾는 재미도 있다. 가라오케 씬에서 샬롯이 밥을 쳐다보며 귀엽게 춤을 추며 부르는 프리텐더스(The Pretenders)의 히트곡 “Brass In Pocket”이나, 역시 그곳에서 밥이 부르는 록시 뮤직(Roxy Music)의 “More Than This” 등은 놓치기 아까운 곡들이다.

특히 빌 해리스가 이 상큼한 뉴 웨이브 곡을 건조한 표정과 우수에 찬 저음으로 쓸쓸히 읊조리는 모습은 음악 팬들만이 캐치할 수 있는 인상적인 장면이다.

 

이 영화는 ‘번역하기 어려운’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소통의 단절을 말한다. 그러나 주인공들은 독백과 속삭임, 말이 필요 없는 눈빛과 침묵을 통해 더 깊게 소통한다.

이 영화를 가득 채우는 몽환적인 풍경과 알 수 없는 절박한 감정들은 우리의 외로움을 잠시나마 위로하는 잔잔한 희열을 선사한다.

그런데 밥이 샬롯에게 한 귓속말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각자의 상상에 맡기는 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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