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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을 기억하다] 첼로의 혼, 파블로 카잘스

숑숑파 2024. 10.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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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 첼로, 그리고 파블로 카잘스

첼로의 역사로 불리는 파블로 카잘스(Pablo Casals, 1876.12.29 ~ 1973.10.22)의 서거 51주년이 다가온다. 올해는 또다른 첼로의 거장인 야노스 스타커(Janos Starker)의 탄생 100주년으로 국내외에서 감상회 등 행사가 있었지만, 필자는 카잘스의 기일을 더 선명히 기억한다. 
 
오르가니스트였던 아버지로부터 음악을 배우고 11살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첼로를 연주한 그는 마드리드 교향악단과의 협연, 카잘스 트리오 활동 등 어린시절부터 전형적인 천재 연주자로 성장하였다.
 
카잘스를 첼로의 거장으로 우뚝 서게 한 곡은 역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다. 
13세 소년이던 카잘스는 헌책방에서 우연히 이 곡의 악보를 발견하여 무려 12년간 이 곡을 연구하였고, 1925년 처음으로 6개의 조곡 전곡을 녹음하였다. 
카잘스가 녹음하기 전 그저 부분적으로 연주되고 회자되던 이 대곡은 카잘스가 최초로 전곡 연주를 한 후로 바흐 최고의 명곡 중 하나이자 첼로의 바이블(성서)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1번 모음곡중 프렐류드 필사본(바흐의 아내인 안나 막달레나의 필사로 알려져 있음, 출처 : 나무위키)

 

바흐가 쾨텐에서 궁정 악장직을 맡아 일하던 시절인 1720년 경 쓰여진 곡이라고 추정되는 이 작품은 총 6개 모음곡으로 가장 유명한 1번(G장조 BWV 1007) 모음곡은 1개의 전주곡(프렐류드)와 5개의 춤곡으로 구성되어 있다(전주곡-알라망드-쿠랑트-사라방드-미뉴에트I&II-지그).
 
카잘스의 연주 이후로도 많은 명 첼리스트들이 이 곡을 연주했고 그를 뛰어넘는 명연도 있지만 역시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카잘스의 곡으로 기억된다. 
 
오케스트라와 현악 합주에서 무거운 저음으로 근음을 보조하는 역할에 머물던 첼로는 카잘스로 인해 인간의 목소리를 닮은 아름다운 독주 악기로 재탄생하였다. 그의 운지와 운궁 등 연주법은 현대 첼로 연주의 교범이 되었고 카잘스 이후의 모든 첼리스트들은 그의 영향을 받았다. 
 
카잘스는 그가 안고 함께 흐느끼던 악기인 첼로와 결국 한몸이 되어 첼로 그 자체인 영원한 거장이 되었다. 

권력과 음악, 그리고 은둔

20세기 초중반 서구의 거장 음악가들의 삶이 대부분 그랬듯 파발로 카잘스의 연주 인생도 순탄하지 않았다. 
1930년대 말 스페인 내전이 일어나고 스페인도 파시즘의 광풍에 휩싸이게 된다. 카잘스는 프랑코 정권을 인정하는 나라에서는 연주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등 독재 정권의 폭압에 저항하여 프랑스로 망명한다. 
그는 조국 스페인에 다시 돌아가지 않고, 1955년부터 푸에르토 리코로 이주하여 연주활동을 이어가다 향년 97세로 눈을 감았다. 첼로처럼 굵직하고 파란만장했던 장수(長壽)였다

바르셀로나 근처 몬세라트 산에 있는 파블로 카잘스 동상

 

또 그는 <Workingmen's Concert Association(노동자공연협회)>라는 단체를 설립하여 가난한 사람들이 음악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등 클래식의 대중화에도 앞장섰다. 
 
순수 고전음악이 권력이나 정치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그러나 삐뚤어진 권력은 대중적인 영향력이 큰 거장 연주자들을 포섭하려 하였고 이게 잘 안되면 탄압하였다. 
힘있는 권력에 순응하거나 무력하게 억눌린 거장들도 있었지만, 카잘스는 참지 못했다. 그의 망명과 은둔은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묵직하고 순수한 저항이었다. 

1961년 11월 13일 백악관 콘서트에서 케네디 대통령 부부와 인사하는 카잘스

내가 태어난 카탈루냐의 민요인 [새의 노래]라는 곡을 들려드리겠습니다.
카탈루냐의 새들은 푸른 하늘로 날아오르며 'peace peace peace' 하고 노래합니다. 
(1971년 유엔 평화상 수상 기념 연주에서 카탈루냐의 독립과 세계 평화를 기원하며 카잘스가 한 말)

 

권력과 정치와 상관없는 음악은 역설적으로 가장 정치적인 수단이 될 수 있다.

영원히 빛날 카잘스의 명반

그의 인생과 정치적 행보는 역시 배경일 뿐이다. 그의 음악에만 집중해도 될 터이다.
카잘스는 많은 음반을 남기지도 않았고 대부분 1960년 이전 녹음이라 음질이 좋지 않은 게 아쉽다.
 
카잘스의 명연 중 개인적으로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되는 세 장의 앨범을 골라보았다.

1. Bach : Suite for Solo Cello No. 1 in G major BWV 1007

[무반주첼로 모음곡] EMI LP 앨범

 

카잘스의 대표 레퍼토리인 [무반주 첼로 조곡]은 1925년 녹음이 존재하지만 음질이 좋지 않아 1938년 파리에서 녹음된 EMI 발매반을 많이 듣는다.  
모노(Mono) 녹음이지만 비교적 깨끗한 음질이고 2시간 10분여의 연주시간으로 다소 빠르게 연주한 편이다. 

[무반주 첼로 모음곡] 미국 발매 LPANGEL RECORDS 앨범


동곡의 또다른 명연인 피에르 푸르니에(Pierre Fournier)의 Archiv 음반(1960년 녹음)은 2시간 18분여, 로스트로포비치(Mstislav Rostropovich)가 말년이 되어서야 도전한 EMI반(1991년 녹음)은 2시간 30분에 가깝다.
 
카잘스 이후 명연들이 정제되고 모던하게 들리는 데 비해 카잘스의 연주는 날것 같이 거친 음색이 살아 있고 격정적이다.  
특히 1번 모음곡의 4악장 사라방드(Sarabande)의 음색은 그윽하고 사색하는 듯한 음간의 무음마저 아름답게 들린다.

 

[파블로 카잘스의 바흐 무반주 첼로 연주 전곡, 1938년 녹음]

 

2. Beethoven : Cello Sonata No. 1 in F major op. 5-1

베토벤 첼로 소나타 전곡이 실린 필립스 앨범

 

흔히들 [무반주 첼로 조곡]이 첼로의 구약성서라면 베토벤의 5개의 첼로 소나타는 신약성서로 부를 만큼 명곡으로 손꼽힌다. 
카잘스의 베토벤 첼로 소나타 1번 연주는 1954년 체르킨(Rudolf Serkin)과의 연주도 있지만 1962년 필립스 발매반이 더 유명하다. 프랑스 프라드에서 열린 카잘스 페스티발에서 피아노의 대가 켐프(Wilhelm Kempff)와 협연한 F장조 소나타는 이 곡 특유의 쾌활함이 잘 살아있어 자주 듣게 된다. 

3. Bruch : Kol Nidrei op. 47

브루흐의 [Kol Nidrei]가 담긴 카잘스의 첼로 협주곡 모음집

 

독일의 작곡가 막스 브루흐의 명곡으로 첼로와 관현악을 위한 작품인데, 첼로 협주곡 형태로 자주 연주된다. 유대교 고전 성가인 ‘Kol Nidrei(모든 서약들)’에 기반한 작품으로 카잘스는 1936년 런던심포니오케스트라와 이 곡을 녹음했다. 
음질은 좋지 못하지만 60세 전성기에 이른 카잘스의 기교와 감성이 잘 드러나는 고색창연한 명연이다. 
 
지나치게 우울해질 수도 있지만 혼자 있는 사색의 시간에 가장 잘 어울리는 소리라면 첼로 연주가 아닐까 한다. 그윽하고 따스한 첼로 선율과 함께 가을이 깊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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